by 앤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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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도서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중국바이어가 관심을 보였고 중국에서 아동대상으로 서비스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내왔다.
그래서 시장조사를 위해 사장과 함께 직원 몇 명이 중국에 다녀오기로 했다.
우선, 김은희 실장과 황정선 디자인팀장, 재무담당 김재운 차장, 영어가 좀 되는 이필화 대리, 콘텐츠 관리 및 영상조작을 위해 장민호 대리, 그리고 영업팀에서는 김광은 팀장이 가게 됐다.
흥수는 생각한다.
‘안 그래도 전시회 이후 민호가 자신을 피하는 눈치인데, 이런 상황에 필 대리와 민호만 중국에 가면….’ 상상하기도 싫다.
‘아! 안돼, 반드시 내가 가야 되는데 어쩌지? 전시회 때 아무 일도 안 한 김광은 팀장이 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전시회 내내 고생은 내가 했는데, 어떻게든 내가 가야 하는데….’
국내 초등학교에 전자도서관이 설치되자, 학교 간 소문으로 경쟁심리가 작용하여 문의전화가 쇄도한다.
전국 각지에 출장을 다니느라, 영업팀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옳거니, 그거야! 하하하, 역시 난 똑똑하다니까.'
흥수는 학교에 방문할 때마다 전자도서관을 설치하며 무슨 일 생기면 꼭 김광은 팀장에게 연락하라는 당부와 함께 팀장의 명함을 뿌려댔다.
그러자, 팀장을 찾는 전화가 많아졌고 업무는 점점 많아져 직원채용도 해야 하고 김광은 팀장은 자리를 비우기 어렵게 됐다.
결국, 중국출장은 흥수가 등 떠밀려 가는 것처럼 돼버리고 흥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중국출장일정은 일 주간, 업무를 위한 출장이지만 5일간 업무 하고, 입국시간이 새벽이라 전날은 베이징을 중심으로 만리장성, 자금성, 천안문광장 등 유명지로 관광 일정이 잡혀있다.
흥수는 처음 가는 해외출장이지만, 선발대의 남자직원 중 가장 어린 데다 김재운 차장의 부탁으로 출장을 위한 이것저것을 바쁘게 준비하면서 민호의 어색함은 사라졌다.
출발 당일 아침 일찍 공항에 나가 인원과 짐을 확인한 후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 벨트를 매고 창밖을 바라보니 통로의 가운데 자리라 비행기의 길고 각진 매끄러운 날개만 보인다.
잠시 후,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가며 진동과 시끄러운 소리가 요란하더니 어느새 날고 있다.
비행기는 높이 높이 올라간다.
흥수는 자리에 기대고 편하게 앉아 조그만 창쪽을 바라본다.
날개 사이로 뭉게뭉게한 흰 구름이 보인다.
근례에 잠을 잘못 자선지 몸과 마음이 곤해지고 지난 시간이 떠오른다.
대학졸업 후 바로 취업하여 정신없이 달려왔다.
이 사람, 저 사람에 치이며 무언가에 쫓기듯 삶은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한 난장판 같았다.
그런데, 하늘에 떠 있는 바로 지금 한없이 포근하고 여유롭다.
‘평온하고 고요한 이 기분은 무엇인가?’
통로 건너 창가에 앉아 있는 민호를 바라본다.
창밖만 뚫어지게 보고 있는 그.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외로움은 자꾸 잘못된 인연을 남겼지만,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다.
민호와 함께라서 설렌다.
‘올바른 인연을 누가 정의한단 말인가?’
흥수는 그간 수없이 고민한 그것에 대해, 민호가 있기에 그의 차분하고 따뜻함이 자신에게 포근함과 평온함을 주는 것임을, 이제 스스로 솔직해지기로 결심한다.
비행기는 하얀 솜사탕 위를 꿈결같이 지나, 대륙을 향해 더 높이 힘차게 날아오른다.
앞을 알 수 없는 미지의 그곳으로….
***
잠깐 눈을 붙였는데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낯선 공기에 긴장을 하며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을 챙기고 나니, 베이징에 오면 베이징덕을 먹어야 한다며 사장이 모두를 유명한 오리식당으로 이끈다.
원탁식탁에 사장, 경리차장, 기획실장, 디자인팀장, 기획담당, 디자인담당, 영업담당 7명의 정예의 동화사기사들이 둥글게 둘러앉았다.
큰 접시에 가득 담긴 푸짐한 음식들이 둥근 회전식탁을 가득 채우고 가운데엔 그 유명한 베이징 덕이 자리한다.
종업원이 주둥이가 긴 주전자로 다년에 걸친 수련의 결과처럼 묘기라도 부리듯 멀리서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하게 찻잔에 투명한 액체를 따라 준다.
동화사기사들은 감사한 마음에 잔을 입가로 옮긴다.
"크흐~, 물이 아니네, 뭐지?"
이런 푸짐한 안주에 술이 빠질쏘냐, 고량주는 기본이다.
‘대낮인데…? 아, 하늘을 날아온 이곳은 대륙이지! 하하'
사장님이 선창 한다.
“동화사의 미래를 위하여!"
“위하여~~.”
흥수는 민호를 바라본다. ‘우리를 위하여~~.’
흥수는 한국 땅을 벗어나선지 마음이 자유롭다.
아니, 특별한 스케줄이 없기 때문이겠지만, 이국땅에 오니 일상에서 벗어난 듯 마음도 가볍고 자유로운 느낌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똑같이 분주한 느낌이다.
'일벌레 같으니라고' 또다시 뭔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진다.
주책없이 고량주를 마셔선지 흥수는 몸도 나른하다.
“야, 흥, 괜찮아? 주량도 센 녀석이 얼마나 마셨길래 얼굴이 빨갛냐?”
“황 팀장님하고 디자인학교에 다녀올 건데, 넌 숙소에 먼저 가 있던지?”
“그래야겠어, 지금은 딱히 일이 없으니….”
중국시장조사를 위해 팀별 견학을 나섰다.
민호가 눈앞에서 멀어진다.
흥수는 호텔에서 쉬다 저녁약속시간에 맞춰 사장과 함께 바이어와의 약속장소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박 대리, 이번 술자리 아주 중요한 자리니까 잘 부탁하네.”
“네, 사장님.”
흥수가 이번출장에 대동한 가장 큰 이유는 바이어와 함께하는 술자리에 참석하여 사장대신 술을 마셔주기 위해서다.
중국바이어와 밤새 술과 흥에 취해 놀았다.
사장은 젊은 피라며 술 마실 때마다 흑기사놀이에 재미를 붙였다.
그 덕에 흥수는 새벽부터 기억이 없다.
어떻게 숙소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속이 말이 아니다. ‘일은 잘 된 건지?’
창으로 햇볕을 쏟아 뱉는 태양은 이미 중천에 떠 있고 뿌연 먼지가 가득하다.
칼칼한 목에 물을 쭉 들이켜 적신다.
‘휴~, 이제 두 번의 미팅이 남아 있군. 정신 차려야지.’
민호는 일찍 나섰는지 옆에 있는 빈 침대는 싸늘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 전날 밤 겨우 일이 없다.
그래서 모두 모인 밤.
“며칠 안 되는 기간 동안 다들 수고했어요. 처음이라 어떻게 될지는 결과는 기다려봐야겠지만, 각자 맡은 일 열심히 해 주어서 고마워요. 오늘 밤 재미있게 놀고 내일은 관광합시다. 일이 잘 되면 내가 우리 집에도 초대해서 와인대접을 하겠습니다. 하하하”
“모두 건배.”
“건배.” 사장의 선창에 따라 건배하고 모두 독한 술을 단숨에 입안에 들이붓는다.
모두들 맡은 임무를 긴장하며 수행했던 탓에 이 자리가 더없이 즐겁고 자유롭게 느껴진다.
여느 때와 다르게 끝났다는 생각에 술잔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자주 울려댄다.
술 업무를 담당한 흥수도 몸이 지칠 대로 지쳐있지만, 두 번 다시없을 자리이기에 기꺼이 합석 중이다.
민호는 역시나 황 팀장 옆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불쑥불쑥 들리는 이야기가 중국시장에서 디자인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다.
‘암튼 못 말린다니까.’
사실 흥수는 자신에게는 없는 저런 전문가다운 열정적인 모습이 부럽다.
그러나 흥수 입에서는 “야! 장 대리, 쫌생이처럼 일이야기 그만하고 좀 즐겨라~~.”
“건배.” 그러면서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든다.
“황 팀장님, 장 대리 어때요?”
“응?”
“일 잘하냐고요?”
“물론이지, 내 오른팔이야. 호호호”
사실, 황 팀장이 중국에서 내내 장 대리를 대동하는 모습이 흥수 눈에는 직원 이상의 모습처럼 보였다.
자꾸 신경이 쓰이는 중이라, 황 팀장 옆자리로 이동해 슬쩍 앉는다.
"황 팀장님, 이번 출장 고생 많으셨습니다."
"흥 대리도 술 마시느라 고생했어요. 호호."
"그러게요. 힘들어 죽겠습니다. 술 마시느라, 민호도 입국날 보고 오늘 처음 제대로 봐요. 하하하"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다 같이 건배!"
사장과 김재운 차장은 어느새 숙소로 들어갔고, 젊은 피, 솔로들만 술을 마셔대고 있다.
정신이 몽롱해질 즈음 김 실장이 진실게임을 요청한다.
김 실장, 황 팀장, 필 대리, 흥 대리, 장 대리 이렇게 다섯.
우선 김 실장이 황 팀장에게 질문한다.
“황 팀장은 왜 아직까지 솔로야? 누구 좋아하는 사람 없어? 장 대리 어때? 하하하”
“실장님도 참, 나야 땡큐지~. 그러는 실장님은 왜 애인도 없어요?”
“나? 나 이혼했어, 몰랐지?”
순간 주위가 조용해진다.
“인연이 아니더라고, 누가 좋은 사람 좀 소개 좀 해 줘, 하하하”
어색해질 새라, 민호는 바로 물어본다.
“실장님, 어떤 스타일이 좋은데요?”
“잘 생기고 착한 사람.”
“그럼 흥 대리 어때요? 잘생겼지, 매너 좋지, 잘 놀지 딱이네.”
“야, 장 대리. 실장님이 나 같은 걸 좋아하겠냐? 농담 좀 그만해라.”
“농담 아니라, 진짜. 실장님하고 너하고 잘 맞을 것 같은데, 나이 차이만 극복하면.”
“하하, 흥 대리만 좋다면 나도 좋지. 하하하”
다들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을 즐기다 밤이 깊어갈수록 하나둘씩 숙소로 사라지고….
“흥수야, 우리도 방으로 가자.”
“어.”
“고생했어.”
“너도.”
민호와 흥수는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숙소로 다정히 걸어간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보름달이 세상 곳곳을 비추고 있다.
아무것도 숨기지 못하게 하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