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앤드장
·
10 min read
흥수는 입사 후 업무와 사람을 알아가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며 적응했지만, 직장인의 생활은 여전히 시간에 쫓기며 일주일이 금세 흘러간다.
김광은 팀장은 시간이 갈수록 빈번하게 흥수를 아무 때나 불러내어 불만을 토로한다.
중요한 결정 건을 대표 허락 없이 독단으로 일처리를 하고, 잘못되면 오히려 대표 욕만 실컷 해댄다.
꾹 참으며 듣는 흥수는 폭발하기 직전이 되고 퇴근 후 방앗간뒷담화의 주재료는 김광은 팀장이 되고 방아에 매일같이 찧기고 있다.
흥수의 불만을 차분하고 주의 깊게 들어주는 민호.
보통 불만을 이야기하면 함께 욕을 하고 자신의 불만도 토로하거나 귀찮다는 듯 대충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일반적인데, 민호는 자신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진심을 다해 들어주는 게 느껴진다.
자신이 팀장 욕을 하며 또다시 민호에게 위로를 받고 있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긍정의 탈을 쓴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나와는 전혀 다른 아이인가?'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 예측이 안 되는 일반적이지 않은 민호에 대해 머리가 아파온다.
흥수의 계획과 다르게 상황이 흘러간다.
‘이게 아닌데, 매일같이 실패다. 다른 작전이 필요해.’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대상으로 전자도서관 판매 및 샘플 구현을 위해 민호와 김광은 팀장이 함께 제주도로 1박 2일의 출장을 간다는 것이다.
"팀장님, 제주도로 출장 가신다면서요?"
흥수의 느닷없는 질문에 김광은 팀장은 흠칫 당황했지만 태연하게 말한다.
"내가 이야기 안 했나? 제주초등학교 시연 때문에 디자이너 장 대리와 다녀오려고."
"아, 제가 가면 안 될까요? 팀장님 바쁘시잖아요."
"어? 바빠도 할 일은 해야지. 하하"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일은 내가 다 하는구만, 이런 때만 자기 할 일이지?'
"그럼 장 대리 대신 제가 가면 안 될까요?"
"디자인 샘플을 보여줘야 하는데 자네가 할 줄 아나? 본사 일이나 잘하고 있으라고. 내가 고생하다 올 테니. 하하"
'제길, 고생은 무슨, 바람 쐬러 가는 게 뻔한데. 아, 맘이 왜 이리 답답하고 불편하지? 내 동기가 그 못된 인간이랑 제주도를 간다고?'
문득 김기민 조교가 생각나고 불안이 흥수를 자극한다.
흥수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팀장님,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인데, 장 대리 사실 남자를 좋아해요. 그래서 저와 가자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았어. 내가 확인해 볼게, 하하"
김광은 팀장은 귀찮다는 듯 흘려듣고 만다.
그렇게 둘은 제주도로 떠났다.
자그마한 비행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커다란 흰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다.
비행기 안의 창가 쪽으로 김광은 팀장과 민호가 나란히 앉아 있다.
스쳐 지나가듯 흘려들었던 박 대리 말이 자꾸 뇌리에 떠오르는 김광은 팀장.
'장 대리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음, 그러고 보니 박 대리와 항상 같이 있던데…. 오늘밤에 확인해 봐야겠군, 재미있겠어.'
비행기 창밖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장 대리를 보며 김광은 팀장은 실소를 머금은 표정을 짓는다.
"장 대리, 피곤할 텐데 잠이라도 자지 그래?"
"아! 네 팀장님, 하늘에서 보는 구름은 너무 신기하고 아름다운 거 같아요."
비행기 창밖 풍경에 감탄하느라 팀장의 말을 잘 못 듣고 동문서답하는 장 대리.
그가 이상하긴 하다고 생각하며 김광은 팀장은 눈을 감는다.
민호는 비행기 타는 것도 처음인 데다, 도착하자마자 택시로 여러 학교로 이동하며 직접 설명하느라, 바쁜 일정에 제주도인지 어딘지 정신이 없다.
그렇게 제주도에 도착하여 둘은 바쁘게 학교 샘플 시연을 마쳤고, 김광은 팀장은 묘한 흥분을 느끼며 투 배드가 아닌 원 배드로 호텔룸을 체크인했다.
민호는 호텔도 처음이라, 그런가 보다 하며 넓은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진다.
“이 녀석 뭐지?”
김광은 팀장은 혼자 한껏 상상하고 흥분했던 스스로가 어이가 없다.
피곤에 지쳐 금세 시끄럽게 코까지 골며 자고 있는 장 대리를 보고 제주까지 왔는데 이 밤을 잠만 잘 순 없다고 생각하며 하룻밤의 일탈을 하고자 유흥가로 나선다.
‘얼마만의 자유인지!’
김광은 팀장은 자식 둘을 둔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아버지다.
직장은 꿈, 적성, 즐거움 이런 것들과는 먼 그냥 돈을 벌기 위해 다니며 악착같이 살고 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터에서 월급을 받으며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그래서 동화사에서 혼자만 동떨어져 왕따에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이번 출장은 본인을 위한 휴가쯤으로 생각하고 일탈을 꿈꾸고 있다.
유흥가로 내달리는 택시 뒷자리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기대앉아, 흐르는 노랫가락에 맞춰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김광은 팀장.
흥수는 김광은 팀장과 담배를 피우며 민호에 대해 했던 말이 자꾸 머리에 맴돌아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다 잠깐 잠든 사이 트라우마처럼 군 시절의 김기민 조교가 또다시 자신을 괴롭히는 꿈을 꾸었다.
꿈에 자신과 민호가 함께 있고 김기민 조교에게 민호도 당하고 있다. 자신이 도우려 하지만 역부족이라 생각했는지 순간 돌변하여 민호를 조교와 함께 괴롭히며 즐기다 흥분하여 잠에서 깨었다.
아랫도리가 몽정으로 축축하다.
‘이런!’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새벽달빛이 머릿속을 더욱 하얗게 만든다.
밤새 잠을 설쳐서 몸은 나른한데, 출근을 하면서도 민호에 대한 생각은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어제 떠난 민호는 오후 늦게나 사무실에 올 것이다.
‘별일 없었겠지?’
그들이 제주도 출장을 마치고 오후 늦게 도착했다.
민호가 다가와 제주도 특산물이라며 한라봉초콜릿을 건넨다.
그의 표정을 보니 안심이 된다.
"잘 다녀왔냐? 별일 없었어?"
"어. 김 팀장님이 결혼반지 잃어버린 것 빼곤 별일 없었어."
"반지를? 어쩌다가?"
“몰라, 혼자 유흥가를 다녀온 모양이야.”
“너는?”
“난 일만 해서 그런지 엄청 피곤하다. 얼른 들어가야겠어.”
‘미친 팀장 또 뻘짓을 했구만, 결혼반지를 잃어버리다니, 아무튼 아무 일 없었던 거 같아서 다행이야. 놀 줄도 모르는 순진해 빠진 내 착한 동기 녀석. 후후~~’
그 아이를 속세에 물들이려 그렇게 노력했건만, 자신이 그 아이에게 물든 것인지 애인을 원수와 여행 떠나보낸 것처럼 노심초사 불안함에 잠을 한숨 못 잔 꼴이다.
밤새 잠을 못 자서 흥수도 몸이 무겁고 나른하지만, 민호를 보니 마음은 가볍다.
민호와 함께 퇴근하고 집에 와 모처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든다.
오늘은 개도 보이질 않는다.
***
동트기 전 안개 자욱한 깜깜한 새벽이다.
어둠 속에서 길게 이어져 나온 새끼로 만든 얇은 개 목줄을 잡고 있는 흥수.
줄이 당기는 쪽으로 끌려간다.
‘도대체 여긴 어디지?’ 사방이 어두워서 분간할 수가 없다.
한참을 끌려가다 보니 앞쪽에 작은 빛나는 물체가 보인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그리운 어머니 얼굴을 하고 있는 날개를 가진 천사다.
흥수는 어머니란 생각에 왈칵 눈물을 흘리며 천사가 내민 손을 잡으려는 찰나 천사를 등지고 태양이 떠오른다.
눈이 부셔 흥수는 눈을 질끈 감는다.
잠을 깬 흥수.
"뭐지? 희한한 꿈이군."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다.
흥수는 멍하니 있다가 순간 민호가 뇌리를 스친다.
오늘은 주말이지만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개마저 사라지고 언제부턴가 주말이 무료해졌다.
차라리 회사에 출근해서 잡무나 볼까 한다.
“내가 이럴 줄은…, 어이가 없다.”
이런 자신을 부정하지만, 나오는 말과 다르게 얼굴엔 미소를 짓고 있다.
이미 발길은 사무실로 향하고 있고, 몸은 무겁지만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마음이 즐겁다.
사실은 괜한 일을 핑계 삼아 민호를 보러 회사에 가는 것이다.
그가 출장으로 업무가 쌓여 주말 근무를 한단다.
회사에 도착하여 디자인실로 들어가 보니 혼자 모니터 앞에서 마우스를 이리저리 옮기며 작업 삼매경에 빠져 있는 민호.
‘인기척이 났을 텐데….’
다가가 자세히 보니 이어폰을 끼고 일에 집중하고 있다.
‘무얼 듣고 있을까?’ 궁금해하는데 뒤를 돌아보며 놀라는 민호.
“흥, 어쩐 일이야? 놀랐잖아.”
“어, 나도 일이 좀 있어서. 그런데 사람이 오는 것도 모르고 무얼 그렇게 집중해서 들어?”
“들어볼래?”
이어폰을 흥수에게 건넨다.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가사와 리듬이 가슴속에 파고든다.
“좋은데. 제목이 뭐야?”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줄 테니 들어봐~.”
“응.”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흥수 마음이 딱 그랬다.
'아, 행복하다.’
그와 단둘이 있는 공간이 푸근함으로 가득했고 아무 걱정 없이 그냥 그 시간이 좋기만 했다.
그땐 몰랐다.
이뤄지지 않는 ~면, 만약의 가사로 시작하는 이뤄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바람의 노래라는 것을…. 오로지,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의 노랫말만 흥수의 귓속에 맴돌 뿐이었다.
이른 저녁시간 업무를 끝내고 민호는 흥수의 수척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혼자 사는 사람끼리 영양 보충하자며 사골국밥집으로 향했다.
주문한 국밥과 수육이 나왔다.
민호는 수육을 흥수 앞에 놓아준다.
“많이 먹어라. 내가 쏜다.”
입 안으로 들이킨 국물이 흥수의 온몸으로 스며든다.
‘따뜻하다.’
***
디자인을 하고 있는 장민호는 다복한 가정의 오 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모와 형, 누이의 사랑을 받으며 구김살 없이 밝고 바르게 자랐다.
어릴 적 누이들이 학교에 가면 홀로 남아 쉽게 만날 수 있는 옆 집 예쁜 여자 아이와 엄마 아빠 소꿉장난을 했던 기억, 부모님의 말을 잘 들으며 엄마가 이끄는 데로 여행을 다닌 그리 특별하지 않은 기억이 꿈처럼 가물가물할 뿐이다.
그 아이는 남자색인 파란색이 좋았으나, 한 살 터울인 형이 먼저 선택하면 티셔츠도, 신발도, 학용품도 좋아하지 않는 남아있는 빨강을 갖게 돼도 아무런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쉽게 주어지는 것으로 놀았고 성장했다.
그래서 착하고 바른 아이가 됐고, 스스로 느끼는 이런 무의식의 순종이 낯선 게 아니었다.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던 누이들의 영향으로 그림을 접하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그림에 자연스럽게 흥미와 재미를 느꼈다.
그 섬세하고 수동적인 여린 이미지를 일반적으로 여성스럽다고 이야기하듯, 그에게서 이런 부드럽고 따뜻함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흥수는 어릴 적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엄마라는 따뜻한 품이 한없이 그리웠다.
엄마의 사랑을 받는 친구를 보면 너무나 부러운 나머지, 처음엔 그저 부러움에 친해지고자 했으나 결국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걸 가진 친구에게 질투와 패배감이 들며 오히려 친구를 괴롭혔고 혼나게 되면 엉뚱한 거짓말로 자신을 감추고 숨겼다.
자존심 때문에 진심을 말할 수 없기도 했지만, 말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 연일 술에 절어 스스로 자신 안에 갇혀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피해 다니는 게 오히려 나았고 누구의 보살핌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것과 다름없었다.
그에겐 내내 아무도 없었고, 외롭고 추웠다.
외로움을 달래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언제나 갈구했다.
그래서 그는 손에 닿는 아무나 사랑했다.
그게 그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일지라도….
그런데 지금 흥수 앞에 부드럽고 섬세하며 따듯한 민호가 있다.
흥수는 민호에게서 모성애적인 아니마를 느낀다.
※ 아니마(anima) : 남성의 무의식 인격의 여성적 측면을 원형이라고 규정했다. 남성이 가지는 모든 여성적인 심리학 목표 성질이 이것에 해당한다. 남성이 가지는 미발달의 에로스(관계의 원리)이기도 해, 이성의 여성에게 투영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