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앤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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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파릇한 나뭇잎들이 햇살에 싱그럽게 반사되고 담장너머 덩굴로 핀 빨간 들장미와 아카시아향이 온 천지에 가득한 신록이 푸르른 계절이다.
매년 이맘때면 동화사는 야유회를 떠난다.
바쁜 일정이지만 그날 하루는 일상과 다르게 노는 날이다. 특별할 건 없지만, 다 함께 운동하고 고기와 술을 마시며 편하게 이야기하고 노래와 캠프파이어를 즐기며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올해는 사회자로 말재간이 좋은 영업부의 흥수 대리를 여기저기서 이구동성으로 추천하여 그가 맡게 되었다.
그간 술자리에서 떠들며 나름 친목을 다진 탓이다.
학창 시절 불우한 가정사로 수학여행은 물론이고 소풍조차 즐겁고 설레는 기분으로 간 적이 없거늘, 처음 가는 직장에서의 야유회인데 거기에 사회자라니….
흥수는 당황스러웠으나, 표리부동하게 여유로운 척하는 것에는 익숙한 그다.
경영지원실 김재운 차장이 넘겨준 스케줄에는 족구, 발야구, 손수건 돌리기, 노래 및 장기자랑, 캠프파이어 일정으로 꽉꽉 차 있지만 실상 장기자랑만 사회자가 필요하다.
입사 후 술자리를 자주 하며 거의 모든 직원의 특징을 알고 있으니 짧은 시간이라 그다지 부담 없단 생각이 든다. 오히려 민호와 함께 한다는 생각에 즐거움이 크다.
‘어떤 이벤트를 준비할까?’
야유회 당일, 날이 반짝반짝 빛나는 산과 들로 놀러 가기 안성맞춤인 날이다.
개인 차량에 삼삼오오 나누어 타고 강원도 두메산골의 야유회 목적지를 향해 차의 시동을 건다.
“부릉, 부릉~~”
김은희 실장과 민호 대리, 흥수 대리가 황정선 팀장의 차에 타고 함께 이동 중이다.
빠르게 달리자 “찰칵” 하며 자동차문이 자동으로 잠긴다.
“이제부터 당신들은 나로부터 도망칠 수 없어.” 하며 황 팀장이 재치 있게 말한다.
“깔깔깔”
출발부터 차 안이 웃음으로 가득하다.
“흥 대리, 재미난 거 준비 좀 했어?”
“그럼요. 실장님. 기대하세요. 하하하”
“뭔데?” 민호가 묻는다.
“너랑 노래하는 거. 하하하”
“뭐야! 농담하지 말고, 기대하고 있을게.”
“우리 실장님 노래 꼭 시켜주라, 흥 대리. 노래 부르고 싶어 죽겠단다. 엄청 잘해~ 호호.”
“황 팀장 이러기야? 어떻게 알았어. 호호호”
쉼 없는 대화와 웃음이 이어지며 때로는 진심을, 때로는 농담을 나누며 각기 다른 온도차로 웃음이 전해진다.
깊은 산속 도로 길을 한참 오르다 언덕에 다다르니 순간 마법처럼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인 동화 속 그림 같은 아담한 숙소가 나타났다.
숙소에 딸린 운동장에서 족구, 발야구, 손수건 돌리기까지 팀을 나누어 진행하고 다들 몸이 지친 상태에서 먹는 바비큐와 술은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허기와 수분이 필요한 몸으로 금세 빨려 들어간다.
여기저기 건배를 외치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온통 시장 통처럼 시끌벅적하다.
디자인 사업부 사람들도 한 무더기를 이루어 남자직원 중 막내인 민용이 땀 흘리며 열심히 고기를 뒤집고 있고 고기판 주변에 인석 대리와 민호 대리가 나란히 붙어서 사무실 밖에서도 여전히 아웅다웅하며 술을 들이켜고 있다.
“야. 장 대리 먹지만 말고 고기 좀 구워라. 우리 막내 술 좀 맥이자.”
“사돈 남 말 하시네, 민용아 집게 줘라.”
“괜찮아요. 고긴 제가 구울 테니 술이나 한 잔 받으시죠, 장 대리님.”
“역시 우리 민용이야!”
둘은 잔을 부딪치고 건배한다.
“장 대리님, 형 같아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상한 말이 돌던데...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죠? 그러면 안 돼요.”
‘무슨 소리지?’
갑작스러운 의외의 물음에 장 대리는 잠시 멍하다.
아끼는 후배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난감함에 뭐라 할 말이 없다.
“뭔 소리야? 개소리 집어치우고 술이나 마셔.”
술만 마시면 과격해지는 윤인석 대리가 혀 말린 소리를 하며 잔을 들이민다.
“짠, 건배!”
거하게 취기가 올라오고 어느새 붉은빛의 노을이 산 너머 하늘에 걸렸다.
아름다운 노을을 배경으로 흥수가 마이크를 들고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동화사! 동화사?” 일제히 마이크를 쥔 흥수를 쳐다본다.
“예 합니다.” 갑자기 조교 말투로 말한다.
“동화사?”
“네~”
“소리가 작다. 동화사?”
“네~에~”
“오늘밤 죽어라 놀아봅세다.”
스피커에서는 신나는 리듬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알코올로 기분 좋게 취한 몸은 리듬에 맞춰 흔들리고 흥수는 모든 걸 내려놓고 민호 앞에서 음악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어 대고 있다.
“♪Oh, all I do is wanna talk about you~~”
민호도 따라 몸을 흔들고 즐거운 흔들림이 바이러스처럼 주변으로 퍼진다.
온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다.
“♪I said you're the only one I wanna talk about you~~”
한참을 노을 지는 분위기에 취하고 신나서 흔들던 몸이 지쳐갈 즈음 흥수는 다시 마이크를 잡는다.
“동화사의 여왕님이신 김은희 실장님을 모십니다. 박수!”
춤을 추듯 흔들거리는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가는 그녀. 볼이 불그레한 게 좀 취한 거 같다.
“제가 노래 좀 하거든요. 호호호. 한곡 부를게요. 음악 큐~~.”
스피커에선 잔잔한 트로트 전주가 깔리고 순식간에 주위가 고요해진다.
“♪진실한 사랑은 뭔가, 괴로운 눈물 흘렸네.
헤어져간 사람 많았던 너무나 슬픈 세상이었기에~~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노래가 끝나고 김은희 실장의 불그레한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그 앞에 서 있는 황 팀장도 같이 눈물을 흘리며 멍하게 있다가 순간 정신 차리고 달려 나가 김 실장을 안고 자리로 들어와 의자에 앉힌다.
흥수도 당황했지만, 서둘러 적절한 멘트로 말한다.
“네. 이 아름다운 밤에 어울리는 멋진 곡이었습니다. 다음은 다들 아시는 것처럼 제 동기 민호와 제가 한 곡 띄워보겠습니다.”
훅 들어온 멘트에 민호는 당황했다.
‘이 자식 이거였어. 준비한 재밌는 게? 하하’
민호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재빠르게 마이크를 잡고 반주기계에 흥수와 자주 노래방에서 불렀던 노래번호를 누른다.
그리고 흥수에게 웃음으로 시작의 신호를 보내고 마이크를 입으로 가져간다.
"♪땅거미 내려앉아 어두운 거리에 가만히 너에게 나의 꿈 들려주네. 에- 에- 에- 에- 에- 에- 에- 에-
너의 마음 나를 주고 나의 그것 너 받으니 우리의 세상을 둘이서 만들자.
외로움이 없단다 우리들의 꿈속엔 서러움도 없어라 너와 나의 눈빛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 함께 나누자. 너와 나 너와 나, 너와 나만의 꿈의 대화를 에- 에- 에- 에- 에- 에- 에- 에- ♪"
서로에 얼굴을 보며 맘껏 큰소리로 불러댄다.
흥수의 눈에는 민호밖에 보이질 않는다.
캠프파이어의 불꽃이 노래에 맞춰 하늘을 향해 흔들리며 붉게 타 오른다.
스피커에서는 연이어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 리듬에 취해 젊은이들은 다시 끓는 피를 쏟아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