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앤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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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상반기에 출시한 동물 창작동화집의 반응이 괜찮다.
그래서 곧 있을 국제도서전에 맞춰 영어와 중국어버전으로 번역하여 출간하기로 급하게 결정 됐다.
야유회 이후 연일 야근모드다.
항상 그렇듯 이번건도 김은희 실장과 황정선 팀장이 주축을 이뤄 진행 중이다.
황 팀장은 야유회 때 김 실장의 이유 모를 슬픔에 함께 이입이 되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고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에 조용한 자리를 가지고 싶은데 너무 바쁜 나머지 여의치 않다.
황 팀장은 우직히 한길을 걸어오며 다른 것에는 무관심한 탓에 남들이 쉽게 하는 연애, 데이트 한번 못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대상도 없이 누군가가 그리웠다. 아니 외로웠다.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이 아름다운 이를 보면 마음이 끌렸다. 아름다운 그림이 끌리듯이...
그날 눈물 흘리며 노래를 부르던 김 실장의 모습은 보호본능이 생길 만큼 아름답고 가엾게 느껴졌다. 그 후로 황 팀장은 김 실장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작업 내내 조용히 그녀와 이야기할 기회를 살폈지만, 일정이 빠듯하기도 하고 그녀는 예전과 다름없이 일에 집중하고 있다.
이젠 일에 집중하는 모습조차 이전과는 다르게 특별하게 느껴지고 있다.
황 팀장은 이런 자신이 좀 의아스럽다.
그냥 측은한 마음인지, 관심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자신을 잘 모르겠다.
언제 시간 나면 그녀와 대화 좀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동물창작집은 다국어버전의 동화책이 출간되고 국제 전시회에 참석하는 도서관 팀의 솔루션에 전자책으로도 탑재한다.
전자책은 인쇄물과는 좀 달라서 장민호 대리에게 진행토록 했다.
"팀장님, 요즘 많이 바쁘시죠? 저도 전시회부스 준비하면서 전자책도 챙겨야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네요. 하하"
"이번에 출시된 창작동화 좋던데요. 고생하셨어요. 팀장님."
"고마워, 장 대리."
“특히, 곤충편의 일러스트는 최고예요! 거미와 뱀은 실제보다 더 징그럽던데요!”
"다 꼼꼼한 실장님 덕분이지 뭐."
"역시 팀장님이셔, 두 분은 정말 환상적인 짝꿍 같아요. 부러워요. 팀장님."
"장 대리도 동기 있잖아, 흥수 대리. 둘이 잘 맞지?"
"그렇쵸 뭐, 같이 전시회부스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하"
황 팀장은 소문에 대해 물으려다 어색해질까 돌려서 질문을 한다.
"장 대리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장 대리는 신뢰하는 황 팀장이기에 웃으며 대답한다.
"팀장님요. 우리 친누나 같아요. 하하하"
"호호호, 그래 고맙다. 장 대리."
"근데, 실장님은 어떤 거 같아?"
"뭐가요? 음…, 좋은 사람 같아요. 지적이고 성격 좋아 보이고…, 그런데 만나는 사람 없데요?"
"그런 거 같던데…."
"음, 흥수도 솔로인데, 나이차이가 좀 나도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다리 놔줄까요?"
"한 회사에서 무슨 소개야. 냅둬, 장 대리!"
"자, 일이나 하자."
"예~ 썰!"
황 팀장은 김 실장에 대해 괜히 물었다 생각하고 장 대리에 대한 소문은 그냥 소문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렇게 김 실장과의 대화를 위한 적절한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일만 하다 금세 전시회 날이 다가왔다.
***
매년 유월에 열리는 국제도서전에 전자도서관 팀도 부스를 할당받아 전시회에 참가했다.
첫날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부스에 사람이 붐비지는 않는다.
관람객 대부분 부스 앞에 설치한 모니터의 영상만 보다가 지나쳐간다.
가끔 영상을 바꾸며 끊기지 않게 해 주면 돼서 준비할 때 바빴던 거에 비하면 너무 한가롭다.
전자 동화책 팸플릿부터 샘플, 부스인테리어까지 전시회 준비를 하느라 야유회를 다녀온 후 한 달가량을 흥수와 민호는 단짝처럼 붙어 다녔다.
흥수는 정신없이 바쁘지만 요즘처럼 즐거운 적은 없었지 싶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그리고 동성애자라고 소문을 낸 덕분인지 자신 말고는 민호를 상대해 주는 직원이 없어진 듯하다.
민호가 따돌림을 받아 자신밖에 없게 될 상황을 상상하니 더욱 즐겁다.
흥수는 자신이 소문을 낸 원흉인지도 모르는 민호를 보며 생각한다.
'그래, 계획대로 잘 되고 있어. 너는 나밖에 없게 될 거다. 하하'
"오늘 전시회 끝나고 술 한잔 할까?, 좀 지쳐 보인다?"
"그래. 날도 더운데 시원하게 맥주 한잔 하자, 필화 대리도 고생하는데 같이 가자고~"
기획팀의 이필화 대리. 간혹 부스에 들르는 외국인을 상대로 영어전자책을 소개하고 하루 종일 딴짓만 하며 전시회 내내 흥수 주위에서 얼쩡대는 그녀.
'훗, 잘 생긴 건 알아가지고... 발정 난 고양이처럼 냄새를 풍기는 색정녀 같군.'
필화 대리가 영어를 구사할 때마다 그녀만 쳐다보는 민호가 느껴진다.
‘설마, 민호 녀석이 필화 대리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일을 마치고 마시는 맥주는 역시 꿀맛이다.
모처럼 민호가 웃고 떠들며 술을 마셔댄다.
소문 때문에 맘고생을 해선지 아니면 필화 대리가 앞에 앉아 있음인지 여느 때와는 다르게 기분 좋게 마셔댄다.
전시회 이야기하다가 상사의 뒷담화까지 부서별 대표대리들이 모여 서로 험담대회를 하듯 불만이 수돗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 필화 대리가 민호에게 묻는다.
"장 대리님, 혹시 흥 대리님 좋아하세요?"
'헉, 저게 취했나?' 흥수는 순간 민호의 얼굴을 바라본다.
민호가 멍한 표정으로 얼어붙어 있다.
"네?"
"아니,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우리끼리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민호가 술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신다.
"필 대리님, 무슨 소리예요. 우린 친구사이예요. 절친 하하하" 흥수가 억지웃음으로 분위기를 바꿔본다.
"그럼, 나 흥 대리님 좋아해도 되는 거?" 라며 흥수에게 눈웃음을 치는 필화.
'여우 같은 고양이다.'
필화 대리가 계속 흥수에게 들이댄다.
반면 민호는 술만 계속 들이켜고 있다.
"필 대리님, 사실 나 대리님께 관심 있어요." 구부러진 혀로 떠드는 민호.
'오호, 그래? 좋아. 니가 필 대리에게 관심 있다 이거지.' 또다시 흥수에게 악마의 기운이 올라온다.
흥수는 민호의 말이 퍼지기도 전에 재빠르게 필화대리에게 말한다.
"필 대리님, 나랑 둘이 2차 갑시다. 민호는 술 취해서 더 못 갈듯 싶으니."
"어머머, 기다리고 있었어요. 흥 대리님. 호호호"
흥수는 취한 민호를 홀로 남겨놓고 필화 대리의 어깨를 감싸 안고 나와 버린다.
'장민호, 너두 어디 한번 지독한 외로움을 느껴봐라.'
민호는 친구와 짝사랑하는 여자가 함께 껴안고 나가는 뒷모습을 본다.
“아~”
서로 다른 이를 바라보고 있는 엇갈린 세 사람이다.
다음날,
전시회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부스에 손님이 유난히 많다.
그런데 민호가 출근을 안 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지각 한번 안 하던 녀석인데, 어제 좀 충격을 먹었나?’ 흥수는 가볍게 생각한다.
필화 대리는 여느 날과 다르게 도맡아 열일을 하고 있다.
흥수는 어제 2차에서 필 대리의 기분을 맞춰주며 적당히 마시고 신사처럼 택시를 태워 보냈다.
업무시간이 끝나갈 즈음 필화대리가 "오늘 마지막 날인데 같이 저녁 먹어요, 흥 대리님!"하고 상냥하게 묻는다.
내심 흥수와의 관계에 기대하는 눈치다. 그러나, 흥수는 적당히 핑계를 댄다.
"너무 피곤해서..., 다음에 먹어요. 필대리님."
"네? 네…."
업무시간이 끝나가도록 민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 마신 숙취가 지금 올라오는지 흥수는 머리가 너무 아프다.
아니,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거 같다.
퇴근길에 민호의 집으로 향하며 전화를 걸어본다.
“어, 몸이 많이 안 좋니?”
“아냐, 어제 술을 너무 마셨는지 기억도 안 나고 몸살 났나 봐.”
민호는 친구를 잃을까 기억이 없다며 그 답지 못하게 돌려 말한다. 민호는 어제상황이 아직 정리가 안 됐다.
“오늘 마지막 날이라 많이 힘들었겠구나? 어서 들어가 쉬어~.”
“약사서 너의 집에 들를까?”
“아냐, 내일 보자.”
민호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리곤 신호가 끊겼다.
흥수는 그의 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발길을 돌린다.
흥수는 마음이 아프다.
'이게 아닌데, 뭔가 잘못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