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앤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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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호는 3월의 이른 아침,
한강이 보이는 발코니에서 햇살에 길게 뻗어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며 진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스피커에서는 아주 오래된 히트곡인 somewhere only we know이 흘러나오고 오랜 기억을 더듬고 있다.

3월의 이른 아침, 투명한 아침 햇살이 온 세상을 비추고 있다.
아직 차가운 공기가 몸을 움츠려 들게 하지만, 흥수는 첫 출근에 대한 설렘과 긴장감으로 가슴이 두근대며 몸과 마음이 적당히 데워져 있다.
동화를 판매하는 동화콘텐츠 회사인 "동화사"에 영업직으로 입사하여 첫 출근 중이다.
이번 회사는 잘 지내리라 다짐하며 새내기 입학 날처럼 단정한 차림으로 한껏 멋을 내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는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긴 데다, 말주변도 나쁘지 않아 어딜 가든 인기가 있고 성격 좋아 보이는 호감형이라 이곳에 영업직으로 지원하여 어렵지 않게 합격하였다.
면접관의 이직 이유를 묻는 물음에 동화와 사람을 사랑해서 이곳에 지원하게 됐다는 그의 이야기를 농담처럼 들었겠지만, 거짓을 말한 게 아니었다.
사랑에 허기져 아무나 쉽게 사랑하는….
그게 흥수의 삶에서 아킬레스건처럼 치명적인 흠이라면 흠이었다.
직장경력 3년 만에 두 번째 직장인 이곳, 동화사로 이직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아무나 쉽게 사랑하는 게 그였다.
흥수는 가는 곳마다 사람에 너무 기대서일까 힘들어지고 결국 타인에게 기댄 삶은 엉망진창이 돼 버린다. 사람에 지치지만 결국 사람에서 희망을 느끼는 도돌이표를 찍으며 살아가는 외로운 솔로다.
그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결국 부모님은 이혼했고 실의에 빠져 자식들을 돌볼 여유가 없는 아버지와 함께 살며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탓인지 사랑에 굶주린 것처럼 항상 사람에 허기가 졌다.
학창 시절을 한부모란 이유로 주변의 놀림을 당하면서 관계에 대해 고민하며 그런 놀림의 낌새가 느껴지면 오히려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말재간으로 선수를 쳐 상황을 뒤집으며 놀림에 대한 대응법을 익혔다. 그러나 그런 습관은 주변시선이나 사람들을 더욱 신경 쓰게 되고 민감해졌으며 그런 진실되지도, 주체적이지도 못한 삶의 태도는 더욱 타인에 의한 삶만 살아갈 뿐, 진실한 친구하나 사귀지 못하고 외로운 학창 시절을 지냈다.
훈훈한 외모와 눈치 빠른 순발력으로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전자회사의 영업직으로 입사하여 3년을 사람경험을 하며 나름 사회에 적응했지만, 아무리 어릴 적부터 다져온 눈치 백 단에 입담이 좋은 흥수라도 영업일이라는 게 눈치 볼 일이 많았고 상사에게 까이는 게 허다한 이 바닥인지라 스트레스로 업무 끝나면 자연스레 동료들과 술을 마시게 되고 뒷담화하는 게 일상이 돼 버린 것이다.
잘생김과 젊음은 사람을 꼬이게 했지만, 진실하지 못한 그런 관계에서 누군가에게 기대는 버릇은 더욱 외롭게만 할 뿐이었다.
그가 꿈꾸는 삶과는 다르게 하루하루 치열했고 사회생활은 생각과 달랐다.
집을 잃어 우연히 돌보게 된 잡종견만이 유일한 위안이 될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거짓된 태도는 점점 사람 간 관계를 힘들게 했고 외로운 흥수를 더욱 고립되게 만들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어느 날 그곳을 탈출해 지금 향하고 있는 이곳, 동화사에 입사를 한 것이다.
'이번에는 일만 열심히 하리라' 마음을 다지며 흥수는 따스한 봄날에 느낌 좋은 두 번째 직장에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큰소리로 호기롭게 인사한다.
그러나, 썰렁하다. 누구 하나 대답이 없고 투명인간 취급이다. 잠시 후에 면접 때 봤던 경영지원실의 김재운 차장이 달려 나와 흥수를 반겨준다.
"첫날부터 일찍 출근했네요? 대부분 출근 전이니 우선 영업부자리에 있다가 타 부서 직원들을 소개해 줄게요."
아침시간이라 분주해 보이지만 동화를 다루는 회사답게 귀여운 장식품과 창이 많아서인지 사무실이 밝고 환해서 기분을 좋게 한다.
잠시 후 김재운 차장이 부른다.
"일단 직원소개부터 해 줄 테니, 따라오세요."
동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콘텐츠를 파는 일이 영업부소속인 흥수의 일인데, 업무 관련 부서의 직원 소개차 각 부서 사무실을 방문하며 인사를 건넨다.
동화콘텐츠를 만드는 게 주요 업무인 곳이라, 사무실의 가운데 위치한 디자인사업부의 규모가 제일 크다.
흥수는 '첫인상이 중요하니 잘해야지'라고 다짐하며 한 명, 한 명 인사를 하던 중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누구더라? 맞다! 군 시절에 나와 함께 훈련을 받던 친군데….’ 이 인연에 흥수는 마음속으로 놀라움과 반가움을 느낀다.
악수를 청하며 "너 나 몰라?" 그 친구는 머리를 갸웃한다.
'당연하겠지, 벌써 10년 전, 그것도 훈련소에서 머리를 빡빡 민 상태였으니.'
그러나 흥수는 기억이 선명하다. 3번 훈련병 장민호.
앳되고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 유독 인상 깊었던, 딱히 그와 인연이 있던 것도 아닌데 그 시절 기억이 선명한 건 그때 흥수에겐 잊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
하나, 둘.
하나, 둘.
조교의 인솔에 맞춰 파릇한 훈련병들의 구령이 우렁차다.
이곳은 신병훈련소.
말년 병인 김기민은 지루하고 지겹기만 하다.
어리바리한 훈련병을 2년 가까이 대하다 보니 감흥도 없는지 하품만 하고 있다.
김기민 조교가 맡게 된 이번 기수는 충청도병력들이다. 확실히 몸동작이 느려 터졌다.
"아, 씨발.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냐?"
'한 달간 이것들을 군인으로 만들어야 된다니, 향도라도 잘 뽑아야 내 남은 군 생활이 편할 텐데'
"누구 향도 할 사람?"
"11번 훈련병 박흥수, 제가 하겠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은 선택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었지만, 모두가 같아 보이는 이곳에선 자신이 선택해서 잘하고 싶은 마음에 손을 들었다.
"오~~ 호라, 짜식 잘 생겼는데~ 좋아! 소리 질러봐~."
"네? 아~~~."
"목청이 작다."
“아~~ 악.”
군대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손을 든 흥수는 그렇게 향도가 됐다.
일주일이 정신없이 흘렀다.
흥수는 아직 훈련은 힘들지만 적응이 됐는지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향도를 맡고 남들보다 솔선수범하면서 한 소대병력의 대표훈련병이란 생각에 나름 자부심도 생기는 것 같다. 조교들의 잔심부름도 하지만 잠자리에 들 때는 뿌듯함도 간혹 느끼는 중이다.
조교 3명에 훈련병 50명.
'김기민 조교를 선임으로 한 악랄한 조교들, 훈련 때마다 얼차려와 부당한 명령에 지옥 같은 나날을 버티는 내가 리드를 하고 있는 나의 동기들….'
그중 어려 보이는 통통한 얼굴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쓰러질 듯 위태위태해 보이는 3번 훈련병이 눈에 띈다.
'저 친구는 누구지?' 개인적 호기심이 생길 정도로 이제 여유까지 생겼다.
어느 날처럼 고된 훈련을 마치고 다들 곯아떨어져 자고 있는 새벽시간, 누군가 머리를 툭툭 쳐대는 바람에 눈을 떴다.
꿈에도 보기 싫은 김기민 조교가 얼굴을 드밀고 씩 웃고 있다. 순간 놀라 괴성을 지를 뻔했다.
손가락으로 따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뭐지? 이 야심한 새벽에. 똘아이 새끼.'
조용히 조교의 그림자를 따라간다.
봄이라지만, 새벽녘이라 아직 쌀쌀하고 새벽달이 고요하게 연병장을 비추며 빛과 고요함을 뿜고 있다.
'수돗가를 왜 가지?'
가까이 다가서자 옷가지들과 양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낡은 옷들이 젖은 채 달빛에 반사되니 고약한 냄새까지 나는 듯하다.
“야, 향도”
“11번 훈련병. 박흥수.”
"이거 날 밝기 전에 다 빨아라~, 안 그럼 다른 거 빨게 해 줄 테니~~ 낄낄낄."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말 안 들으면 오늘 하루 종일 모든 훈련병이 고생할 줄 알아라, 알겠나?"
흥수는 당황스럽다.
군대라 조교 말이면 다 들었지만, 이런 것도 하는 건지? 자기가 무슨 왕이라도 되는 양, 시종 부리듯 막 대한다.
'제기랄 어쩌지?'
더럽지만 이곳은 군대다.
우선, 질러댄다.
"넵! 알겠습니다."
조교는 뒷짐을 지고 휘파람을 불어대며 달빛 가득한 연병장을 가로질러 막사 안으로 들어간다.
흥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동트기 전 까만 밤하늘엔 밝게 아우라를 뽐내는 달빛아래 별들이 총총하다.
그중 아스라이 떨어지듯, 가장자리에서 샛별이 유독 빛을 발하고 있다.
생명을 다하기 전 온 힘을 다해 빛을 내는 듯이….
흥수는 꼭 자신 같다고 느낀다.
하루하루 마지막 날처럼 열심히 살았다.
지금은 더욱 그러하다.
정말이지 악으로 깡으로 사는 것 같다.
서글픔에 군가를 흥얼대며 빨래더미를 처대고 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어느새 몸에 스민 군기다.
첫 경험은 무엇이건 뇌리에 강하게 남게 된다.
흥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정에 목말랐지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사랑에 사람에 굶주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느라 제대로 된 사랑을 못한 체 군대에 입대해 그 외로움을 군기로 메우고 있다는 느낌이다.
육체적 고된 훈련 덕에 취침 점오 등이 꺼지면 바로 곯아떨어지는 나날들이지만, 오래된 외로움은 몸에 배여 흘러넘치는지 그처럼 외로운 인간들만 꼬였다.
그래서일까?
그날도 일주일 전처럼 머리를 처대는 김기민 조교.
이번에도 수돗가로 끌고 가서 일주일간 빨래가 쌓였으니, 빨라는 것이다.
싫다면 거시기를 빨라며 바지를 내린다.
'아! 제길.'
간밤의 첫 성적경험은 뇌리에 치명상을 남겼다.
이젠 밤마다 깨워서 더 많은 걸 요구하고 괴롭힌다.
‘아~, 왜 이런 곳에서 저 악랄한 새끼와…, 비참하다.’
얼마 안 남은 훈련소생활 조금만 버티자 다짐하며 견디지만 더 수치스러운 건 사람과 접촉한다는 게 외로움을 잊게 하는 듯, 타인에 강요에 의한 접촉이지만 그 더러운 흥분으로 뭔지 모를 마음 한구석에서 잠깐이나마 외로움이 달아난 자신을 느낀다.
그날도 화생방훈련에 얼차려에 너무나 지친 날, 어김없이 새벽녘에 흥수를 깨우는 악마조교.
익숙해질까 두려워 그냥 못 들은 척 죽은 듯 누워있자 화가 난 조교는 휘슬을 불어댄다.
"팬티바람으로 모두 연병장에 집합~, 꼴찌는 벌칙이 있으니 빨리 집합하도록."
동기들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
새벽 4시, 갑작스러운 집합구령에 정신없지만, 어리둥절한 동기들은 군기 덕인지 순식간에 오와 열을 맞춰 연병장에 서 있다. 그런데 한 녀석이 아직 침상에 누워 있는 게 아닌가?
3번 훈련병이다. 어제 당번인지라 피곤해서 꿈속을 헤매는지 일어나질 않는다.
조교가 누워있는 훈련병의 귀에 대고 휘슬을 불어대자 그제야 일어난다.
그렇게 빨래더미 벌칙이 3번 훈련병의 차지가 됐다.
‘미안하다. 장민호.’
2화로 이어집니다.
※ somewhere only we know : 영국 얼터너티브 록 밴드 Keane의 2004년 데뷔앨범에 수록된 첫 싱글곡으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와 개인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많은 청중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이야기에서 민호는 노래가 발매된 2004년의 추억을 더듬는다.
※ 아킬레스건(Achilles tendon) : 발 뒤꿈치에 있는 힘줄로 치명적 약점을 표현하고자 비유적으로 사용한다.
※ 향도 : 군대에서 행진할 때 대오의 선두에서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으로 글에서는 훈련병 대표를 의미한다.